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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동백(나무) 관련 사연 / 산타나 산행이야기

by 솔나리와 땅나리 2024.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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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나무 관련 사연들

< 여수 망마산 동백나무 >

현재 여수시 시전동 선소 뒷산이 망마산이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은 자신의 어머니가 기거하고 있는 송현마을에서 가까운 망마산에 기마병을 조련하려고 치마장(馳馬場)을 만들었다고 한다. 산봉우리 중앙에다 훈련대(訓練臺)도 만들었으나 지금은 기단석만 남아 있다.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 중 기마병의 훈련을 끝내고 망마산을 떠나면서 말채찍을 심으며 이 말채찍이 죽으면 나의 영혼이 죽은 줄 알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동백나무로 깎아 만든 이 말채찍이 죽지 않고 현재의 망마산 꼭대기 동백나무로 다시 살아났다고 전한다.   [출처] : 망마산 동백나무[望馬山冬栢-]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해홍화 / 이태백 >

동백꽃이 사랑받은 역사는 오래됐고 이태백(李太白)의 시집(詩集)에 해홍화 출신라국 심선(海紅火 出新羅國 甚鮮)이라 적혀 있고 류서찬요(類書簒要)에는 신라국해홍 낭천산다 이차소자 십이월개지 이월흥매동시 일명다매(新羅國海紅 郎淺山茶 而差小自 十二月開至 二月興梅同時 一名茶梅)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 때 이미 중국에 건너가 애완된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 동백나무 (한국민속식물, 1997. 2. 15., 최영전)

 

 

< 통영 충렬사(統營 忠烈祠) 동백나무 >

1985114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606년 충무공 이순신의 아장(亞將)이었던 이운룡(李雲龍)이 통제사가 되어 왕명으로 지은 이순신의 사당인 충렬사에 있는 동백나무이다. 충렬사가 건립된 지 약 80년 후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6.3m, 수관너비는 동서 10m, 남북 9.6m, 가슴높이의 둘레 1m, 밑동둘레 1.7m에 달한다. 추정 수령(樹齡)은 약 400년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나무가 예부터 꽃이 유난히 붉고 탐스러워 충렬사 인근 부락에서 풍신제(風神祭)를 지낼 때 처녀들이 아침 일찍 명정(明井)샘의 물을 길어 이곳의 동백꽃을 물동이의 맑은 물에 띄워가곤 했다고 한다.

[출처] : 통영 충렬사 동백나무 [統營 忠烈祠 동백나무]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선운산의 동백 >

전설에 따르면 선운산가(禪雲山歌)의 주인공인 '망부(望夫)의 여인'이 남편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죽어서 그 넋이 동백꽃이 피었다고 한다. 고려사》 〈악지(樂志)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선운산가에 관한 짧은 기록이 있다. "장사(長沙) 사람이 정역(征役)에 나갔는데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그 사람의 아내가 남편을 생각하여 선운산에 올라가 부른 노래"라고 한다. 집을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심정을 읊은 점에서는 정읍사(井邑詞)와 같다. 다만 정읍사는 행상을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노래인데 대해서 선운산가는 국방 경비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노래이다. 그 애절한 노래가 전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출처] 선운산의 동백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3. 10., 이상희)

 

< 동백나무 가지로 여자의 볼기나 엉덩이를 치면 남자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는 미신>

()나라 때 관리들은 모든 재액을 막기 위하여 허리에 단단한 나무망치로 된 장식품을 차고 다녔는데 이것을 강묘(剛卯)라고 했다.

한나라 중반 때 미신을 이용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왕망(王莽)은 뒤에 유수(劉秀)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되고 유수는 광무제(光武帝)가 된다. 이때 백성들은 힘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유씨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라는 글자를 파자(破字)를 하면 묘() () ()의 세 글자로 된다.

 

여기에서 백성들은 유수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묘자를 싫어하게 되었고 나아가 묘일(卯日)까지도 싫어하게 되었으며 묘일에는 강묘라는 망치를 허리에 차고 나쁜 액운을 물리쳐야 한다는 미신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동백나무로 만들어진 망치는 액운을 쫓기도 하고 그릇된 것을 깨뜨리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것이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여자의 엉덩이를 쳐서 남자아이를 낳게 하는 연장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동백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는 까닭에 민간에서 다자다남을 상징하게 되었고 나아가서 이 나무는 여자의 임신을 돕는 것으로 믿어졌다그런데 이런 풍속에 중국의 유수 설화에서 기인한 강묘 풍습까지 곁들여졌다는 것이다.

[출처] 꽃이야기, 동백꽃말, 동백꽃전설 |작성자 대청봉

 

 

< 울산동백 >

과거 학성(울산) 일대에서 자생하던 동백이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몽땅 넘어가고 국내에서는 씨가 말랐다가 1989년 최종두 시인이 교토 지장원에서 이를 발견하여 민·관을 통틀어 각고의 노력 끝에 3세목을 울산으로 이식하였다. 일본에서는 '오색팔중산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고, 이름 그대로 나무 하나에서 다섯 가지 색의 동백꽃이 핀다.

 

울산시청앞 오색팔중산춘

 

< 오색팔중산춘’의 진위, 가릴 때가 됐다

‘울산동백’으로도 불리는 ‘오색팔중산춘(五色八重散椿)’이 시술대에 올랐다. 그 이면에는 진위(眞僞)를 가리기 위한 울산시의 노력이 숨어있다. 잘못 알려진 사실이 역사적 진실로 둔갑하는 것을 막겠다는 뜻에서라면 나무랄 일이 못 된다.
일본인이 붙였다는 ‘五色八重散椿’이란 동백나무 이름이 자못 흥미롭다. 시 관계자는 ‘다섯 가지 색(五色)이 여덟 겹(八重) 꽃잎으로 피어나 한 잎씩 떨어지는(散) 동백(椿)’이란 뜻이라고 풀이한다. 여기서 ‘춘(椿)’은 ‘동백’을 뜻하는 일본식 한자다. 울주군 온산 앞바다 ‘목도(目島)’를 일제 강점기에는 ‘춘도(椿島)’라고 불렀다

 

이 희귀종 동백나무는 임진왜란 때 왜군 수장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에서 캐서 본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갖다 바쳤고, 도요토미는 이를 교토의 지장원(地藏院)이란 절에 바쳤다는 설이 전해진다. 본보 취재진에 따르면 가토가 가져갔다는 동백은 수명을 다해 1983년 고사(枯死)했고, 지금 지장원에 있는 동백(교토시의 천연기념물)은 그 2세로 수령이 130년 남짓 된다.

문제는, 한동안 전해져오던 입소문을 일부 울산시민들이 역사적 사실(史實)로 믿는 가운데 몇 가지 기념행사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는 점이다. 시에 따르면, 2012년부터는 동백꽃이 피는 시기(올해는 3월 22일)에 맞춰 ‘울산동백 헌다제(獻茶際)’가 열리고, 지난해(2022년)부터는 시의 지원을 받아 ‘울산동백 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일련의 입소문을 실제로 있었던 일로 여기게 된 데는 저명인사 2인의 역할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오색팔중산춘이 1992년 6월 1일, 울산시청 앞마당에 심어진 것이 가장 상징적이다. 이 무렵 언론매체는 “울산동백이 400년 만에 환국했다”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그 이후 울산 중구청은 오색팔중산춘 10여 그루를 사들여 구청 울타리와 울산왜성(학성공원) 꼭대기 등 두 곳에 나눠 심었다. 그러나 중구청 울타리에 심은 나무들은 대부분 도둑을 맞았고, 울산왜성 꼭대기의 나무들은 철제 시설물 안에 갇힌 신세로 전락했다.

식물학 전문가 정우규 박사는 ‘오색팔중산춘, 언제까지 엉터리 정보 확대재생산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언론매체에 기고한 일이 있다. 그는 지금도 “이 동백을 살펴보면 다섯 색깔 여덟 겹 동백도 아니고 희귀종도 아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출처] 울산제일일보(http://www.ujeil.com)

 

 

< 대중과 함께한 얼레빗 동백기름 >

동백은 상류층의 애완대상이었을 뿐 일반 대중에게는 오히려 천 년을 두고 전아(典雅)한 한국 여인의 머릿매를 맵시 있게 매만져 준 동백기름으로서 더 인상 짙다.

동백나무로 깎은 얼레빗과 동백기름을 이고 산골 무주 구천동에서 땅 끝 두만강까지 행상을 다니던 방물장수 아낙의 서러움도 서려 있다[출처] 동백나무 (한국민속식물, 1997. 2. 15., 최영전)

 

 

< 제주에서는 외면당하는 동백 >

막상 동백의 본밭이라 할 수 있는 제주도에서는 동백나무를 집안에 심지 않는 민속이 있는 경원 당하는 꽃의 신세가 되고 있어 흥미롭다.

제주도에서는 동백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도둑이 잘 든다고 믿었으므로 집안에 심지 않는 나무로 되어 있다. 또 꽃이 떨어질 때 통꽃이므로 꽃잎이 지는 것이 아니라 꽃송이가 꼭지째 쑥 빠져 떨어지는 것이 흡사 사형당할 때 목이 잘려 떨어지는 것과 같은 불길한 인상이라 해서 이를 멀리한다고 전해진다.

[출처] 동백나무 (한국민속식물, 1997. 2. 15., 최영전)

 

< 보령 외연도 사랑나무 >

보령 외연도 상록수림 안에 각기 다른 뿌리에서 자란 두 그루의 동백나무가 이어진 틈새가 없이 공중에서 맞닿아 하나의 가지로 연결된, 신기한 사랑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예부터 사랑하는 남녀가 나무 사이를 통과하면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출처] 동백나무 [冬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거제 외간리 동백나무 >

거제 외간리 이정묵씨집 터에 동서로 각각 한 그루씩 서 있는 이 나무는 높이 7m, 수관(樹冠)은 동서7m, 남북 6m, 수령은 약 350년으로 지엽이 무성하고 지상 40cm 부분의 나무둘레는 2m이다. 동네 사람들은 이 나무를 부부나무라고 하여 가정의 화목과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 받들고 있으며, 매년 섣달 그믐날이면 동산제를 이 나무 밑에서 지닌다. 또한 동백나무의 꽃이 골고루 피면 그해 풍년이 들고 어느 한쪽만 피면 흉년이 든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19911223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거제 외간리 동백나무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숲 >

 

196541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면적 8,265. 서도초등학교에서 4.5정도 떨어진 바닷가의 낮은 언덕에서 자라고 있다.

 

서쪽 바닷가는 바람이 강하여 몇 그루밖에 남지 못하였고 동쪽에만 7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이것들도 강한 바람 때문에 높이 자라지를 못하고 옆으로 퍼져 있다. 이 숲의 동쪽으로 500m쯤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어 이 마을의 방풍림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숲에는 약 300년 전 마량 첨사가 꿈에 바닷가에 있는 꽃뭉치를 많이 증식시키면 마을에 항상 웃음꽃이 필 수 있다는 영감을 받고 바닷가에 가보니 정말 꽃이 있어 증식시킨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뒤 마을사람들은 매년 음력 정월에 이곳에 모여서 풍어와 해상의 무사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동백나무는 남쪽 섬이나 해안에서 자라는 난대성 식물로 이곳 마량리가 육지에서의 북한지가 된다. 요즘에는 꽃이 필 무렵 인근의 소풍객이 모여 관상을 하고 있다.

[출처]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 [舒川 馬梁里 冬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마량당집 동백나무 >

500여 년 전 이 마을 사람들은 뗏목을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였는데 바다에 휩쓸려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던 중 남편과 자식을 잃은 한 노파가 그 앞바다에서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용왕을 잘 위해야 화를 면하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백발노인의 현몽으로 해안사장에서 널에 들어있는 선황 다섯 분과 동백나무 씨앗을 얻어 선황은 신당에 모시고 동백나무 씨앗을 주변에 심었다. 동백나무 숲 85주가 무성하며, 매년 정월 초하룻날 당에 올라 초사흘날까지 제사를 지내온 것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으며, 그 후부터 고기잡이에서 화를 입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내용으로 제사는 선창제, 독경, 대잡이 , 마당제, 용와제, 거리제로 이어져 제사가 시작되기 수일전에 경비로 호당 쌀 한되씩 거두어 드리고 신당부근에 수십개의 어선깃발 풍어, 만선을 꽂고, 화주, 화장(선주의일을 도와주는사람), 당굴(대잡는 사람) 2~3명 등의 의상 준비 등 제반 준비가 끝낸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제주 위미동백나무군락 >

 

1982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위미리 마을을 지나는 우회도로 남쪽 약 500m 되는 바닷가에 이 동백나무군락이 있다. 노거목으로 된 군락인데 나무의 높이는 1012m, 가슴높이의 줄기지름 2035, 수관폭 55.4m에 이르고 있다.

 

동백나무는 난대림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상록활엽수종으로 가지와 잎이 빽빽하게 나서 바람을 막아 주는 효과가 크다. 겨울에 붉은 꽃이 피어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고 열매에서는 기름을 얻어 머릿기름·등유 등으로 사용한 소중한 자원이었다.

 

이 동백나무숲이 만들어진 데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17살의 나이로 이 마을에 시집온 현맹춘이란 할머니가 해초캐기와 품팔이 등 어려운 생활환경에서도 근검절약을 하여 돈을 모았다. 그는 모은 돈 35냥으로 버득이라 하는 황무지를 사들인 뒤 개간하며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런데 농토가 바닷가에 위치해 있어서 바닷바람 때문에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바람을 막기 위해서 한라산에서 동백 씨앗을 따다가 이곳에 뿌려 숲을 만들었고 그 뒤 농사가 잘되었다. 사람들은 이 숲을 버득할망돔박숲’(버득할머니동백숲)으로 부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위미동백나무군락 [爲美冬柏群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세번 피는 동백꽃 >

동백꽃은 세 번 핀다고 한다. 나무에서 활짝 피고, 꽃봉오리째 툭-- 떨어져 땅 위에서 다시 한번 핀다. 나무와 땅에서 활짝 핀 동백 꽃물결을 보면, 동백꽃을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내 가슴에서도 동백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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