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 전설
꽃말 : 영원불멸의 사랑
1000여 년 전에 산수유가 처음 심어진 구례가 산수유 주산지가 된 건 조선시대다.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눌러앉으면서 산수유나무를 많이 심었다. 골이 깊은 산골 지형으로 농사를 짓기가 녹록지 않았다. 지형이 분지를 이루고, 산중의 일교차도 컸다. 바람이 적고 볕은 잘 들어 산수유 나무가 잘 자란 덕이다.
'동국여지승람', '승정원일기',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산수유가 특산물로 재배되고, 한약재로 처방됐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일제강점기때 산수유영농조합이 만들어졌다. 산수유로 역사가 깊은 구례다.
척박한 산골에서 산수유나무는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 옛날에 가난한 농민들이 소를 팔아 자식을 대학에 보낸 것처럼, 이 마을 사람들은 산수유 열매를 팔아서 자식들을 교육시켰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산수유나무 두세 그루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어 '대학나무'라 불렀다.
[출처] 산수유나무..(웨어러블 공기청정기)
산수유 처녀와 바위 총각 이야기
마을에 조릿대를 만들어 파는 총각과 입으로 산수유씨를 까면서 부모를 도와주는 가난한 산수유 처녀가 사랑을 하면서 장래를 약조를 했다
어느날 남원의 만석꾼 집에서 빚 대신 산수유 처녀를 첩으로 줄 것을 요구하고 산수유 처녀 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딸을 만석군 집의 첩으로 보낸다
첩 으로 끌려간 산수유 처녀는 입에 산수유 씨를 물고 실어증으로 살아간다
산수유 씨로 입에 독이 오른 산수유 처녀는 2년만에 쫓겨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월계마을에서 산수유 처녀를 기다리던 조릿대 총각은 뒷산 바위 위에서 산수유처녀가 끌려간 곳을 바라보며 슬퍼하다 죽어 버렸다
이를 안 산수유 처녀는 산수유씨의 독이 몸에 퍼진 상태로 조릿대 총각이 기다리던 바위 아래에 자기를 묻어 줄 것을 말하고 죽고 만다.
그 후 2년 동안 산수유 씨를 입에 물고 정절을 지키며 살아온 씨가 그 곳에서 싹이 터서 산수유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조릿대 총각이 기다리던 바위 아래는 산수유 나무가 다른 곳의 나무보다 더 잘 사라고 있다고 한다.
[출처] [들꽃사랑.kcflower:티스토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삼국유사에 신라 제48대 경문왕과 관련해서 산수유가 등장한다.
경문왕은 왕위에 오르자 귀가 갑자기 당나귀 귀처럼 길어졌다.
왕비를 비롯한 궁궐 사람들은 이 같은 사실을 몰랐지만 오직 모자를 만드는 장인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인은 평생 이 사실을 남에게 말하지 못하다가 죽을 즈음 도림사 대나무 숲에서 대나무를 향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그 뒤에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났다. 왕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대나무를 모두 베고 대신 그 자리에 산수유를 심었다. 그랬더니 그 뒤에는 다만 ‘임금님 귀는 길다’는 소리만 났다. [출처] 의학신문
산수유 이름 전설
중국의 태항산은 전국시대 칠웅의 하나였던 조(趙)나라의 영역이었다.
어느 날 태항산의 약초꾼이 '산유'라는 열매를 왕에게 바쳤으나, 볼품없어 보이는 열매는 왕의 분노와 함께 내쳐진다. 그러나 주(朱)씨 성을 가진 어의가 이 열매를 재배하여 약재를 만들었다.
몇 년 후 왕이 요통으로 고생할 때 어의는 산유로 왕의 병을 고치게 된다.
산유로 치료한 것을 안 왕이 그 이름에 朱를 넣어 '산주유(山朱萸)'라 하였고 여기에서 '山茱萸'란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출처]영남일보
신령이 준 묘약 산수유
옛날 어느 마을에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딸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 소녀는 약을 구하러 다니다 산신령을 만나게 되었다.
산신령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당부하고 딸에게 묘약이니 아버지에게 먹이라고 열매 몇 개를 주었다. 산신령이 준 열매를 먹은 아버지는 병이 싹 나았다.
그 후 딸은 아버지에게 열매의 비밀을 말했고 그 사실을 전해들은 아버지는 동네사람들에게 소문을 냈다.
사람들은 이 열매를 찾겠다고 산을 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산신령이 노하여 두 부녀가 사는 집에 산사태를 일으켰고 온 가족이 다 죽을 위기에 처했다.
아버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딸은 잘못이 없으니 살려달라고 산신령에게 사정했다.
살아난 딸은 아버지를 살려내고자 산신령에게 쉬지 않고 기도했고 소녀의 효심에 감동한 산신령은 그 열매가 있는 곳을 다시 알려주고 그 열매를 먹은 아버지는 다시 살아났다.
그 열매가 산수유나무의 열매였다는 전설이 있다.
재앙을 막는 산수유
옛날에 장방이라는 현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근항경이라는 사람에게 한 가지 예언을 하였다.
"금년 9월 9일 자네의 집에는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이네! 이 재앙을 막으려면 집안 사람 각자가 주머니를 만들어 주머니 속에 산수유를 넣어서 팔에 걹 높은 곳에 올라가 국화술을 마시면 화를 면하게 될 것이네."
근항경은 장방의 말에 따라 그날 집을 비우고 가족들과 함께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장방이 말한대로 국화술을 마셨다. 집에 돌아와 보니 닭이며 개, 소, 돼지, 양 등이 모두 죽어 있었다.
장방은 이 소문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짐승들은 사람 대신 죽은 것이었다네, 국화술이 아니었다면 자네 식구들은 모두 죽었을 거야."
9월 9일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가 국화술을 마시거나 부인들이 산수유 주머니를 차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산동처녀
다른 지역에서도 산동처녀는 쉽게 알아본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산동처녀들은 어릴 때부터 입에 산수유 열매를 넣고 앞니로 씨와 과육을 분리했는데 오랫동안 이 작업을 반복해 앞니가 많이 닳았기 때문이다.
또한, 몸에 좋은 산수유씨를 오랫동안 입으로 분리해온 산동처녀와 입을 맞추는 것은 보약을 먹는 것보다 좋다고 해서 일등 신부감으로 손꼽혔다고 한다.
구례의 젊은이들은 프러포즈의 뜻으로 산수유꽃과 열매를 주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최치원과 동아
중국 산동성 청도, 지금도 청도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예전에 신라방이 있었던 곳도 바로 그곳이다. 산동성은 이래저래 한국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최치원(崔致遠 857~?). 신라 말기 대학자로 유명한 그는 868년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된다.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아버지 최견일이 무표정하게 말하였다.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을 마라.”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 최치원은 열여덟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 후 최치원은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게 된다.
그런데 신라방에 있던 아가씨 가운데 동아라는 이름의 여인이 최치원을 사모하게 되었다.
귀족 출신인데다 인물도 훤칠하고, 더구나 빈공과에 합격한 후 토황소격문 등을 써서 세상을 놀라게 한 인물인지라 여인이라면 누구나 최치원을 흠모할 만하였다.
우연히 동아와 알게 된 최치원 역시 오랜 외국 생활에 힘든 심신을 편하게 해주는 동아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신라방 근처에 있는 적산 법화원에서 자주 만나 사랑을 속삭였다.
법화원은 823년 신라 해상왕 장보고가 당나라에 머물던 시절 거액을 들여세운 불교 사찰로, 당시 적산 인근에 위치한 신라방에 살던 동포들이 모여 단합을 도모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885년, 최치원이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다.
떠나기 전날, 최치원은 동아에게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였다.
“내 바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소.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니 차도를 봐서 반드시 1년 안에 돌아오겠소.” 그러자 동아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하더니 이내 말문을 닫았다.
그런데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최치원은 당나라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잊고 말았다.
더구나 당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천재가 귀국하였기에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중앙관직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진골 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해 890년 이후 대산군(大山郡), 천령군(天嶺郡), 부성군(富城郡)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부성군 태수로 있던 어느 날, 최치원은 갑자기 동아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겠다고 약속한 지 벌써 8년이 지났다.
그래서 임금에게 청해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이 횡행하여 중국행이 무산되고 말았다. 동아가 보고 싶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최치원이 다시 간청하여 얼마 후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게 되었다. 업무를 마치고 짬을 내어 신라방에 간 최치원은 서둘러 동아를 찾았다. 8년 만에 만난 동아는 무척 수척해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최치원을 보는 눈만큼은 빛이 났다.
그런데 어디선가 여자 아이 하나가 달려오더니 ‘엄마!’ 하면서 동아 곁에 다가서는 게 아닌가.
“예쁘게 생겼구나. 이름이 뭐니?”
여자 아이는 부끄러운지 엄마 치마폭으로 숨어들어가면서도 최치원을 바라보며 여린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수아, 장수아.” 잠시 후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떤 남성이 동아를 찾으며 다가오자 그 여자 아이가 ‘아빠!’ 하며 달려들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최치원이 떠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동아가 이웃마을 장씨와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늦게 돌아온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기다리지도 않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고 사는 동아를 보니 최치원은 세상이 싫어졌다.
그렇게 최치원은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돌아가는 최치원을 동아가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었다.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세상살이에 염증을 느꼈다.
골품제도도 문제이지만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고,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하며 배운 지식을 써먹는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최치원은 산천을 유람하며 지내다 말년에 지리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췄다.
905년, 중국 산동성 신라방. 결혼한 지 2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말이 없는 부인이 안타까웠던 장씨가 어느 날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 그가 그렇게도 보고 싶소?”
동아는 느닷없는 남편의 질문에 화들짝 놀랐다. 남편이 이야기한 그는 최치원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놀랍게도 남편이 수아 이야기를 꺼냈다.
“수아 아버지가 누군지도 잘 알고 있소. 내 수아를 친딸처럼 여기며 살았건만 당신이 이리도 그를 잊지 못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수아 이야기까지 꺼내자 동아는 돌연 남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났다.
사실 수아는 최치원이 남기고 간 선물이었다.
최치원이 귀국하던 885년 동아는 이미 수아를 임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아를 낳을 때까지도 최치원이 돌아오지 않자 수아 부모가 수아를 강제로 이웃마을 장씨와 결혼시켜버린 것이다. 물론 착하디 착한 장씨는 핏덩어리 수아를 친딸처럼 여기며 지금껏 키웠다.
수아 역시 장씨를 친아버지로 알고 살았다.
며칠 뒤, 장씨가 수아를 불렀다. 한참을 뜸을 들이던 장씨가 수아에게 말하였다.
“수아야, 실은 네 친아버지는 멀리 바다 건너 신라에 있단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수아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아버지,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세요?”
배시시 웃는 수아를 보며 장씨가 다시 이야기하였다.
“니 엄마가 좋아했던 분은 최치원이라고, 너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분이 바로 수아 니 친아버지 란다.”
수아는 곧바로 어머니께 달려갔다.
“어머니, 제 친아버지가 바다 건너 신라 땅에 있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수아가 숨을 헐떡이며 말하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었다.
“미안하구나, 수아야.”
이야기를 마친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주려고 이야기를 꺼냈던 장씨는 아내가 더욱 더 심란해하자 며칠을 잠을 설치며 고민하였다. 어느 날 장씨가 아내와 수아를 불렀다.
“수아야, 신라에 가서 니 친아버지를 찾는 것이 어떻겠니. 그러자면 신라 사람과 혼인을 하면 좋겠는데...”
그러자 수아가 펄쩍 뒤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버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세요? 제가 미우세요? 왜 저를 신라 땅으로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세요?”
수아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딸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밀어내려 한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께 서운함 마음이 들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아버지 제안에 동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어머니마저 왜 그러세요? 아버지 어머니를 두고 바다 건너가서 어찌 살란 말인가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어머니는 또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수아는 알 것도 같았다.
또한 수아 역시 어릴 적 잠시 보았던 최치원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결국 수아는 장사를 하러 신라방에 들른 신라 청년과 혼인을 하기로 하고 함께 배를 탔다.
신라로 떠나는 수아에게 어머니는 작은 비단주머니를 주었다.
오래 전 최치원이 동아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혹 그분을 만나게 되거든 이 비단 주머니를 보여주도록 해라. 그러면 알아볼 것이다.”
20년을 애지중지하며 키웠던 딸을 떠나보내는 장씨의 가슴도 찢어질 것 같았다.
장씨가 수아에게 뭔가를 건넸다.
“신라에 가거든 이것을 심도록 해라. 산수유 묘목이란다. 고향생각이 나거든 산수유 꽃을 보면서 향수를 달래도록 해라.”
수아가 태어나 살았던 산동에 지천에 깔린 것이 산수유라 사실 수아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워낙 흔하게 보아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구례군 산동면 계척마을에는 산수유 시목(始木)지가 있다. 우리나라 산수유는 모두 이 시목의 자손이다.
1000년쯤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가 바로 중국산동성에서 시집온 수아가 가져온 산수유 나무다.
신라 청년과 결혼하여 구례로 시집 온 수아는 친아버지 최치원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지리산 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다행히 구례가 지리산을 끼고 있는지라 수아는 남편과 함께 틈만 나면 지리산 일대를 이 잡듯이 뒤졌다.
하지만 최치원의 행방은 찾을 길 없었다.
그러는 수아를 시어머니가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최치원의 딸이라는 사실도 믿을수 없는 일이었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살림은 내팽개치고 친아버지를 찾아다니는 며느리나, 그런 며느리를 도와주는 아들이나 다 미웠던 것이다.
더구나 우리말조차 서툴러서 대화도 잘 통하지 않아 시어머니의 구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럴때면 수아는 산수유 나무를 찾곤 하였다. 시집오자마자 심어놓은 산수유 나무가 제법 자라서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면 고향 산동 생각에 잠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해 봄, 최치원이 쌍계사를 다녀갔다는 소문을 들은 수아 부부가 서둘러 쌍계사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쌍계사 입구에 있는 바위에 커다랗게 쓰인 글씨가 바로 아버지 최치원의 글씨라는 말을 듣고 수아는 한 동안 글씨 앞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끼니때가 되어도 밥을 차릴 생각은 하지 않고 걸핏 하면 아버지 소식을 듣고 밖으로 도는 며느리에 대한 구박은 이제 극에 달하였다.
“너는 도대체가 시집을 온 거니, 아버지를 찾으러 온 거니? 시애미 말이 말 같지가 않은 거니?”
그날도 어김없이 수아는 산수유 나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 그루 밖에 없던 산수유 나무 근처에 여기저기에 올망졸망한 아이 나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산수유 나무에 위안을 받은 수아가 서툰 우리말로 시어머니께 간청을 하였다.
“어머니, 딱 한달만 시간을 주세요. 한달만 아버지를 찾아 보고 그래도 안 되면 더 이상 찾지 않을 께요.”
비록 구박은 하였지만 멀리 당나라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신라 땅에까지 시집을 와서 외로움을 타는 며느리가 내심 안쓰러웠던 시어머니가 한 달 말미를 주었다.
쌍계사에서 그나마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하였던 수아 부부가 근처 마을을 돌아보다 마을 앞 냇가 건너편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는 또 다른 글씨를 발견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몇 년 전에 누군가가 귀를 씻고 산으로 들어간다며 세이암(洗耳嵒)이라고 손가락으로 새겼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최치원이 틀림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수아 부부는 범왕리에 있는 자그마한 푸조나무를 보게 되었다. 생김새가 희한하게 생겨서 한참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니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다가 수아 부부를 보고 물었다.
“그 나무는 어찌 그리 자세히 들여다보시우?”
“나무가 참으로 신기하게 생겨서요.”
“신가하다마다. 몇 년 전에 어떤 도인이 지나가다 지팡이를 꽂아둔 것이 싹이 난 것이라우. 그러니 신기할 수밖에.” 할머니 이야기를 들은 수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네? 그 도인이 어떻게 생겼던가요? 그리고 뭐라 하던가요?”
할머니께 들은 인상착의는 쌍계사스님께 들은 인상 착의와 흡사하였다. 역시 최치원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가까이에 아버지 흔적이 이리도 많이 남아 있다니. 수아는 어릴 적 보았던 최치원 생각에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수아를 물끄러미 바라 보던 할머니가 말을 했다.
“그분 말씀이,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 있고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라던데...”
할머니 이야기를 들은 수아는 친아버지인 최치원이 지리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더이상 찾지 않기로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수아는 그 동안 못했던 것을 다하려는 듯 시어머니 봉양에 온 힘을 다하였다.
그러는 사이 산수유 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났고, 열매의 다양한 효능을 알게 된 인근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산수유 씨를 받아가는 바람에 구례 일대가 온통 산수유 천지였다.
그리하여 아예 지명조차 산동마을로 바뀌게 되었다.
산수유 묘목과 열매를 팔아 살림도 넉넉해진 수아 부부가 어느 날 아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갔다.
나들이라 해봐야 근처 개울이었는데 수아는 그동안 십년 가까이 이곳에 살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개울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그도 그럴것이 친아버지 찾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보, 이 개울 이름이 뭐에요? 너무나 아름다워요.”
“응, 이 개울 이름은 서시천이라고 해.”
남편이 들려준 서시천 이야기를 신기하기만 하였다.
마치 중국에서 시집온 자신을 위로하기라도 하려는 듯 중국과 관련된 전설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진시황. 그는 동국(東國)의 지리산에서 불로초가 자란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했다. 3,000여 명이나 되는 사신 일행이 모두 9척의 배에 나눠 타고 지금의 다사강(多沙江)을 따라 올랐다.
모래가 많다는 뜻의 다사강은 섬진강의 옛 이름이다.
그들은 다사강 지류를 따라 지리산에 들어 갔는데, 그 개울이 바로 서시천이다.
당시 사신의 이름이 서불(徐巿)이었다. 그런데 슬갑 불(巿)은 저자 시(市)와 같다.
그래서 본디 서불천인데 훗날 서시천으로 됐다고 한다. 산동에 시장(市場)이 크게 번성할 것을 내다본 것일 수도 있다.
[출처] 산수유나무...(웨어러블 공기청정기)
구례군 산동면 상위마을 각시계곡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오래전 마을로 시집온 새색시가 안타깝게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는 슬픈사연이 전해지고 있고 특히 물에 빠진 곳을 각시소라 부른다고 한다
산동애가
<산동애가> 1948년 여순사건 때 오빠를 대신해 처형장으로 가던 백부전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불렀다는 노래
이 노래는 산수유로 유명한 구례군 산동마을에서 6.25 동란 때부터 유래했다고 합니다.
‘산동애가’는 오빠 대신 처형장으로 끌려간 백부전이 지어 불렀다고 전해지는 애달픈 노래입니다.
백부전은 실존 인물로서 구례군 산동면 상관 마을에서 5남매 막내로 나고 자라 19살 나이에 국군에 의해 총살당했습니다. 부전의 본명은 백순례(白順禮)인데, 노리개처럼 예쁘다고 하여 부전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큰오빠 백남수가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죽고, 둘째 오빠 백남승이 여순사건으로 처형됐으며, 셋째 오빠 백남극(나중에 여순사건 고문후유증으로 사망) 또한 끌려가게 될 상황에서 백부전은 가문을 잇도록 하기 위해 대신 죽음을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죄 없는 양민들이 숨죽이며 살아가던 암흑의 시절, 산수유 꽃처럼 아리따운 열아홉 살 처녀가 형장에 끌려가면서 불렀던 가슴 저린 ‘산동애가’는 지금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이야기입니다.
재판도 없이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의혹만으로 사람을 총살하고 아들 대신 딸을 대살하는 상황은 문명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있었다고 믿기지 않는 역사입니다.
<산동애가>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골을 멍든 다리 절어 절어
다린 머리 들어오는(달비 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잘 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효성 다 못하고
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나 혼자 총소리에(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 열아홉 산동처녀 백부전(순례)의 애사(哀史) >
여수MBC 다큐를 리뷰해 본다. 2001년 당시 62세였던 홍순례의 구술이다.
"시집와서 들으니까 아가씨(백순례)가 모략에 의해서 죽었는데, 이쁘고 똑똑해서 (군인들이) 죽이기가 아깝다고 했다더라. 끌려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또 한 할머니가 덧붙인다.
"잡혀갈 때 노래가 나왔을 거시. 죽은 무덤가서 노래가 나왔다고."
여순사건으로 오빠를 잃었다는 구연자 홍순례씨는 이 노래를 다 부르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고 만다.
백순례의 조카 백정규의 구술은 노래보다 더 애절하다.
"백부님이 끌려가서 죽게 되었는데, 고모님(백순례)이 말하기를, 그래도 집안을 이을 아들 하나는 있어야 할 거 아니냐. 나까지는 죽어도 좋으니까 막내오빠만은 살려달라 애원을 해가지고, 사실은 우리가(백정규 등) 여기 있습니다."
진압군에 의해 끌려가 죽을 막내오빠를 살려내고 대신 잡혀가 죽은 백순례에 대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조카가 보관하고 있는 (백순례의) 큰오빠 결혼 기념사진에 찍힌 가족들의 시선이 아리다.
그저 무심히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는 시선들이 맞닿아 있는 곳은 어디일까?
가운데 어머니를 중심으로, 일본유학을 마치고 징용 나가 사망한 큰오빠,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에 의해 처형당한 둘째 오빠, 6.25때 행방불명된 언니, 자기 대신 죽은 동생에 대한 트라우마와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시달린 막내오빠 등이다.
사진의 맨 왼쪽이 백순례인데, 노리개처럼 이쁘다 하여 아예 백부전으로 불렸다.
부전은 색 헝겊을 둥근 모양이나 병 모양으로 만들어서 두 쪽을 맞대고 수를 놓기도 하고 다른 헝겊으로 알록달록하게 대기도 하여 끈을 매 차고 다니던 여자 아이들의 노리개를 말한다.
조카며느리 박씨의 진술에 의하면 1987년 사망한 어머니 고씨가 치매를 앓을 때 증손녀를 '부전아, 부전아!'하고 부르시곤 했다더라.
치매에 들어서야 막내딸의 환영을 소환한 어머니의 무의식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