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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매화관련 전설 / 산타나 야생화이야기

by 솔나리와 땅나리 2024.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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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언약한 약혼녀의 넋 - 매화

 

 

아주 먼 옛날 중국 산동지방에 용래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다. 마음씨 착한 용래는 부지런히 일했다. 봄이면 다른 청년들 보다 먼저 논으로 소를 몰고 나가 쟁기질을 했고 여름 불볕 더위에도 논의 김을 맸기에 가을이면 남들보다 더 많은 벼를 수확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일을 해서 늦가을이면 창고에 가득 곡식을 쌓아놓고 추운 겨울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용래는 자신이 거두어들인 곡식을 저 혼자 먹는 것이 아니었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그 고을에는 이미 용래의 부지런하고 착한 선행이 소문이 나 있었다. 딸을 가진 사람들은 용래를 사위 삼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마음을 내보는 것이었다. 이웃들이 칭찬하는 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용래는 소리 없이 일에만 열중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 먼 고을을 다녀오던 용래는 이웃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안에서 젊은 여인의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너무 구슬픈 울음소리에 용래는 발길을 멈추게 되었고 그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방 안에는 늙은 여인이 다 죽어가는 눈빛으로 울음 우는 젊은 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네가 좋은 남편 만나 사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아야 하는데....... 이렇게 눈을 감는 것이 서럽구나.”

 

용래는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혼인도 하지 못한 딸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 어머니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한이 맺혀 있는 것이었다. 용래는 젊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맑고 고운 눈빛을 가진 순정한 여인이었다

용래는 그 여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죽어가는 어머니의 소원이라면 낭자 저와 이 자리에서 약혼합시다.”

 

그 소리를 들은 여인은 용래가 싫지 않았던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용래와 그 여인은 죽어가는 어머니 앞에서 서로의 결혼을 약속하는 약혼을 언약하는 것이었다. 여인의 어머니는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약혼 후 3일 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 갑자기 그 여인이 몹쓸 지병이라도 있었던지 그만 의식을 잃고 혼절하는가 싶더니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용래는 사랑을 언약했던 여인의 무덤에서 슬피 울었다. 그 여인에 대한 사랑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신기하게도 용래의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나무 한그루가 돋아났다.  

 

용래는 그 나무를 집으로 가져와서 마당에 심고 평생 동안 그 나무를 바라보며 살았다. 사람들이 용래 더러 그 여인을 잊고 결혼하라고 했으나 결코 용래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리고 늙어 용래가 죽자 이상하게도 한 마리 새가 그 나무로 날아와서는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의 무덤에서 용래의 떨어진 눈물로 피어난 나무를 매화나무라 불렀고 그 새는 용래의 넋이라고 여기며 휘파람새라 불렀다.  

 

봄눈 속에서 제일 먼저 피어나는 매화는 지조를 상징하는 꽃으로 뜻있는 지사와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 전설 속에서도 부지런하고 착한 용래는 자신의 사랑의 언약을 평생을 통해 지켜낸다. 가히 사군자 중의 으뜸인 매화에 얽힌 전설로써 손색이 없다 할만하다. 출세와 영달을 위해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을 수없이 번복하는 사람 같잖은 사람들이 제 잘났다고 도시고 까불며 들끓는 이 시대에 매화꽃 만발한 올봄에는 매화에 얽힌 일편단심 지조 높은 용래의 사랑에 얽힌 전설을 깊이 음미해 보면 좋을 듯싶다.

 

 

매화와 휘파람새

매화와 휘파람새는 붙어 다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고려 때 아름다운 그릇을 만드는 도공이 있었는데 결혼을 사흘 앞두고 약혼녀가 죽자 그는 실의에 빠져 그릇을 만들지 못하였다.
하루는 약혼녀의 무덤을 찾았는데 거기에 매화 한 그루가 돋아나 있어 그는 그 매화를 뜰에 옮겨 심고 그녀를 대하듯 사랑하였다. 그는 항상 매화를 바라보며 자기가 늙어 죽은 후에 매화를 가꾸어 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어느날 그 집에 기척이 없어 동네 사람들이 가본즉 그는 죽고 그 옆에 예쁜 그릇이 하나 있어 열어보니 그 속에서 예쁜 새가 나와 뜰의 매화나무에 앉아 슬피 울더라는 것이다. 이 새가 바로 휘파람새로 도공의 넋이 화한 것이라는 애절한 전설이다.

 

 

 

지금도 휘파람새가 매화꽃을 따라 다니는 것은 바로 도공의 넋이 약혼녀를 못잊어 매화나무를 애절하게 그리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출처] 매화와 휘파람새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3. 10., 이상희)

 

 

대원군의 호매전()

매화를 분재로 만들어 실내에서 애완할 경우 옛날에는 겨울에 얼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오늘날의 온실 구실을 하는 화실()에 보관하여 관리하였는데 이를 매실()이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매실은 고관대작이나 집이 넉넉한 사람의 집에만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원군 때 그의 사위였던 조경호()의 형인 조면호()는 전날 참판을 지냈으나 그후 물러나 들어앉아 살고 있었는데 깨끗한 선비로 이름이 나 있었다. 특히 권세 앞에 허리 굽히기를 싫어하여 대원군에게 한 번도 찾아간 일이 없었다. 하루는 대원군이 사위를 시켜 조공을 불렀으나 때마침 대원군은 평상에 걸터앉아 있었으므로 조공은 절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조면호는 매화를 몹시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난하여 매실이 없는 그에게는 겨울에 매화를 가꾸기가 어려웠다. 그는 그러한 심경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했다.

 

어떻게 매화를 얼지 않게 할 수는 없을까 

올해도 또 매화가 얼게 생겼구나 

 

  

대원군은 마침 조면호의 이 시를 보고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섣불리 돈을 보냈다가는 그 성미에 받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대원군은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하던 중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매화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호매전(護梅錢)이란 이름을 붙여 3천 냥을 조면호에게 보내 그 돈을 거절하지 못하게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한번 음미해 볼 만한 아름다운 일화이다.

[출처]  대원군의 호매전(護梅錢)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3. 10., 이상희)

 

  

단원()의 매화음()

단원 김홍도는 때로는 끼니를 걸러야 할 만큼 가난했지만 항상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나무를 팔려고 하는데 김홍도는 그 매화가 썩 마음에 들었으나 돈이 없어 살 수가 없었다. 이때 마침 어떤 사람이 그림을 청하고 그 사례로 3천 냥을 주자 김홍도는 2천 냥으로 매화를 사고 8백 냥으로 술 여러 말을 사다가 친구들을 불러 매화를 감상하며 술을 마셨는데 그 술자리를 매화음()이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2백 냥으로 쌀과 나무를 집에 들였으나 하루 지낼 것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화선()다운 고결한 인품을 말해주는 일화이다.

 

김홍도, 〈매죽도〉개인 소장

 

[출처] 단원(檀園)의 매화음(梅花飮)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3. 10., 이상희)

 

  

한강()의 백매원()

한강() 정구()는 조선 선조와 광해군 때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조식()과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한강은 38세 때 창녕() 현감()으로 있다가 내직인 사헌부() 지평()으로 발령난 것을 기회로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왔다. 그 무렵에 성주() 회연() 옆에 초당을 마련하고 매화 1백 그루를 심어 '백매원'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자그마한 산 앞에 조그마한 집을 지었도다 

뜰에 심은 매화 국화 해마다 불어나고 滿

구름과 시냇물이 그림처럼 둘렀으니 

이 세상에 나의 삶이 사치함이 그지없네 

 

이 시는 한강이 회연초당과 백매원을 두고 읊은 것으로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등진 대신 이 자연미를 마음껏 향유하는 자기의 생활을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럽다고 말한 것이다.

이 무렵 조식의 문인으로 최영경()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학행이 뛰어나고 기절을 숭상하였다. 최가 한강을 방문하였는데 마침 한강은 출타하고 없었다. 그러자 최는 종을 불러 도끼를 가져오게 하여 백매원에 있는 백 그루의 매화나무를 모두 찍어 버리고 돌아갔다. 이유는 그 매화가 늦게 피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성호사설》에 실려 있는 일화이다.

회연서원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출처] 한강(寒岡)의 백매원(百梅園)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3. 10., 이상희)

 

 

 

조조()의 매림지갈()

매실은 조갈()을 해소시키는 약재이다. 《세설신어()》에는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고사가 실려 있다.

중국의 삼국시대 위()나라의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출병하였는데 길을 잃어 군사들이 몹시 피로한 때가 있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물 한방울 보이지 않자 군졸들은 모두 갈증을 못이겨 도저히 더 행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지략에 뛰어난 조조는 큰소리로 군졸들을 향해 "저 산을 넘으면 거기에는 큰 매화나무 숲이 있다. 어서 가서 매실을 따먹도록 하자"고 외쳤다. 이 말을 들은 군졸들은 매실을 생각하니 금방 입에 군침이 가득 괴어 한때의 갈증을 견딜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산 너머에 매림() 같은 것은 없었지만 조조의 지략이 군졸의 사기를 돋우었다고 한다. 매림지갈() 또는 망매지갈()의 고사이다.

[출처]  조조(曹操)의 매림지갈(梅林止渴)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3. 10., 이상희)

 

 

임포()의 매처학자()

김홍도, 〈서호방학(西湖放鶴)〉간송미술관 소장

 

매화의 원산지였던 중국에는 옛날부터 애매가()로 이름이 알려진 역사상의 인물이 수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첫째로 꼽아야 할 사람은 아마도 송()나라의 화정() 임포()라고 할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임화정은 일찍이 학문에 정려하여 명성이 높았지만 당시의 부패한 정치에 불만을 품은 채 항주()의 서호(西) 부근 고산()에 집을 짓고 은거하여 결혼도 하지 않고 20여년 동안 성시()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신변에는 언제나 백학()과 사슴 한 마리를 데리고 있었는데, 술을 마시고 싶으면 목에 술병을 걸친 사슴을 술집에 술을 사러 달려 보내고 손님이 방문해 오면 학이 공중에서 울어서 알린다고 하는 풍아()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어느 때 아는 사람의 권고에 따라 집 주변에 3백여 본의 매화나무를 심은 후에는 완전히 매화나무에 심취하여 매화를 감상하고는 시를 읊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일생은 과히 '매치()'라는 이름이 어울릴 만큼 매화의 포로가 되어 버린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가르켜 "매화로 아내()를 삼고 학을 아들()로, 사슴을 집안 심부름꾼()으로 삼았다"고 말한 것은 정말 그럴 듯한 평가라고 할 것이다. 영리한 사슴의 등에는 매화 모양의 반점이 있었다는 말까지 전해지고 있다.

어느 봄날 저녁에 그는 서호에서 물에 거꾸로 비친 매화의 정취에 감동하여 바로 시를 읊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산원소매()〉라는 시제의 시로서 매화의 매력을 남김없이 묘사하고 있다.

 

뭇꽃들 시들어 모두 졌는데 홀로 선연히 피어 

조그마한 정원의 풍정을 독차지하였구나 

성긴 가지 그림자는 호수에 어리 비치는데 

그윽한 향기가 움직일 때 달은 몽롱하구나 

 

이 칠율()의 대구()는 매화의 아름다움을 읊은 명대()의 전형으로 이후의 매화 이미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 중심을 이루는 것은 '소영()'과 '암향()'의 대어()일 것이다. 그 이전에는 반드시 매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이 시어()가 이후는 오로지 매화를 의미하게 될 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송대()나 송시()를 상징하는 꽃이 매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되어 버린 것은 다름아닌 이 시가 그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이 시는 확실히 생생하고 운미()가 뛰어남은 말할 것도 없고 매화의 자태와 기질을 완전히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일평()은 《화하만필》에서 임화정은 매화의 신수()를 미득()한 이로서 이 시는 실로 매화시가 생긴 이래 천고의 절조(調)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대구는 오대() 남송()의 시인 강위()의 잔구() '죽영횡사수청천() 계향부동월황혼()'을 각각 한자씩 '소영()······, 암향()······'으로 고쳐서 점철성금()의 효과를 올린 것이라고 하였다.

이익()은 그의 《성호사설》에서 이 시가 절창으로 일컬어지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임화정의 '월황혼()'이라는 글구는, 사람들이 모두 그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황혼이란 말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고금을 통하여 이 구절을 절창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생각으로는 이는 본시 우리가 흔히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말인데 황혼에 달이 뜨면 꽃의 흰 색깔과 혼동이 되어 잘 들어나지 않지만 풍겨오는 향기만은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암향이라 한 것이다. 또 물이 맑고 얕기 때문에 그림자는 반드시 옆으로 비끼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두 구는 다 즉경()을 말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익은 '월황혼'의 뜻에 대해 사실적인 해설을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달이 뜬 황혼녁 눈에 덮여 드러나지 않는 흰 꽃은 은은히 전해오는 향기를 통하여 인식하게 된다는 것과 비낀 가지가 물에 비치는 사실적 경물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방학정(放鶴亭)항주 고산의 북쪽 산자락에 있다. 임화정이 이곳에서 은거했다고 한다.

[출처] 임포(林逋)의 매처학자(梅妻鶴子)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3. 10., 이상희)

 

 

 

매화와 순결한 미녀

 

매화는 그 청초한 자태와 향기로 인해 아름다운 여인에 비유되었다. 시에서 빙기옥골()·선녀·달 등의 이미지와 관련해 표현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매화는 미녀 중에서도 천진하고 순결한 인상을 지닌 미녀를 상징한다.

꽃을 미녀에 비유함에 있어 모란과 매화는 아주 대조적인 위치에 있다. 모란이 풍염한 모습에 성장()한 미녀의 이미지라면 매화는 가냘프고 청순한 모습의 담장()한 미녀의 이미지라고 할 것이다.

다음의 시는 매화의 이러한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옥 같은 살결엔 아직 맑은 향기 있어 

약을 훔쳤던 달 속의 미녀 항아의 전신인가 

 - 이규보(李奎報), 〈매화(梅花)〉, 《동국이상국전집》

 

군옥산 머리에 제일 아름다운 선녀인가 
눈같이 흰 살결 꿈에 본 듯 아리땁네 

 - 이황(李滉), 〈대월영매(對月詠梅)〉, 《퇴계집》

 

 

        하연()부인 정경부인의 영정전북 무주군 하씨 문중 소장                                                백윤문, 〈미인도〉개인 소장

 

중국 당나라 송경()의 〈매화부()〉에서는 매화를 "차갑게 얼어붙은 저녁 무렵의 비에 젖어 이른 아침에 이슬을 머금고 있는 모습은 마치 아황() 여영()이 구응산() 위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풍정과 같고 광풍이 모래먼지를 일으켜 연약한 꽃잎이 차마 견디지 못하고 훨훨 춤추며 떨어지는 모습은 마치 진()나라의 녹주()가 높은 누대에서 가볍게 몸을 날려 떨어지는 모습과 같다"고 했다.

[출처] 매화와 순결한 미녀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3. 10., 이상희)

 

 

 

매화와 선비정신·군자·절개

              매화문 벼루와 송죽매의 문양이 새겨진 먹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유숙, 〈세한영조〉개인 소장

 

매화는 얼어붙은 땅속에 뿌리를 뻗고 눈속에서도 맑은 향기를 뿜는다. 눈보라에 속기()를 다 떨쳐 버리고 고고하게 피어나는 그 모습에는 순수와 결백의 얼이 비친다. 그 강인하고도 고결한 기품에는 불개정심()의 정절을 엿볼 수 있다. 마음속에 모든 것을 비우고 고귀하고 맑은 영혼으로 피어나는 무욕()의 그 모습에는 어딘지 모르게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세속을 초월한 신비와 바닥 모를 깊이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매화의 자태는 선비의 곧은 지조로 즐겨 비유되었다. 매화는 사군자의 필두로서 고결한 선비정신을 상징한다. 매화는 솔·대와 더불어 세한삼우()로 일컬어진다. 극한 속에서도 청초하게 피어서 방향()을 뿜는 그 고고한 모습은 군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소질을 모두 지니고 있다. 전제군주의 세상에서 청결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선비 그 자신의 모습이 마치 백훼()가 이운 가운데 희고 흰 눈속에서 암향을 풍기는 매화의 모습과 같다고 느끼는 것이다.

정도전()은 그의 《삼봉집()》의 〈매천부()〉에서 당시의 선비 하유종()의 고결한 인품을 매화에 비유하여 읊고 있다.

임경빈()은 매화나무는 돈만 많은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나무라 했다. 그들은 돈 버는 궁리만 하느라 인간성이 제대로 높은 곳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매화나무는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매화나무는 은둔하는 선비와 낙향하는 선비를 위한 나무로 보는 것이 옳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도시의 나무라기보다는 시골의 나무이고, 젊은이보다는 명상의 세계를 맛볼 수 있는 성숙한 인간들에게 더 어울리는 나무라고 했다.1) 이것은 모두 매화의 선비정신의 상징성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매화의 이러한 상징성으로 인하여 옛 선비들은 매화의 시를 읊고 매화를 그리기를 즐겼으며 매화문이 새겨진 문방을 사용하고 뜰에는 매화를 심어 군자의 덕성을 배우고자 노력하며 자신과 동일시하여 청빈한 한사()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이다.


다음의 시는 매화를 세속을 초월하여 청결을 지키는 고고한 선비의 모습에 비유한 것이다.

천연한 옥색은 세속의 어두움 뛰어 넘고 
고고한 기질은 뭇꽃의 소란스러움에 끼어들지 않네 

- 이황(李滉), 〈호당매화(湖堂梅花)〉 중에서, 《퇴계집》

 

 

        백자철화 매죽문 연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화백자 진사 도형 연적이화여대박물관 소장

 

매화의 선비정신은 매화를 그리는 경우에도 나타난다고 한다. 사군자 가운데 매화를 그리는 경우에는 특히 작자의 정신세계가 중시된다.

매화법()에는 다섯 가지 필수적인 방법[]이 있다고 한다. 뿌리는 서로 얽혀야 하고 대목은 괴이하여야 하고 가지는 말쑥해야 하며 줄기는 강건하고 꽃은 기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36가지의 병()이 있다 하여 한 가지라도 잘못 그리면 평가를 받지 못하는 어려운 화목이기도 하다.

매화가 시문된 백동제 장도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이와 같은 기본적인 수련을 쌓은 다음에 나무를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화선지에 옮기는데 그 필치가 낙뢰()의 순간 같다고 한다. 고도의 정신세계가 붓끝을 통해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심오한 자연의 이치와 뜨거운 선비 정신이 먹으로 쳐낸 묵매에 살아 숨쉬고 있어야 매화 그림은 성공했다고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림 속에 담긴 정신을 더 높이 보는 것이 매화 그림이라고 한다.

문인묵객들이 매화의 화목을 즐겨 다룬 것은 매화를 그리면서 선비정신을 배우고자 함이었다. 또 선승()들이 매화 그림을 그리는 것을 수도의 한 방편으로 삼은 것도 그 속에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매화는 또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운다 하여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절조 또는 절개를 상징하였다. 매화의 절개를 상징하는 말로 흔히 "매화는 가난하여도 일생 동안 그 향기를 돈과 바꾸지 않는다()"라고 한다.

조선 세조 때의 성삼문()은 자신의 호를 매죽헌()이라고 하였다. 단종에 대한 연군()의 뜻을 눈속에 피는 매화로 표상하고 대나무의 절개를 더하여 충신의 의지를 상징한 것이다.

매화는 또 여인의 순결과 정절을 상징한다. 양가의 여인들이 매화와 대나무를 함께 시문한 매죽잠()이나 매화가 시문된 장도를 즐겨 착용한 것은 이러한 상징성 때문이었다. 사대부 부인의 초상화나 미인도의 배경에는 흔히 매화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그 그림에 그려진 주인공의 순결과 절개를 간접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매화와 선비정신·군자·절개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3. 10., 이상희)

 

 

매화와 애정의 주물()

고대의 중국인에게 매화와 그 열매는 남녀의 결합을 상징하는 주화() 또는 주과()였다고 한다. 청매죽마()라고 하면 한 쌍의 연인이 어릴 때부터 의좋게 지낸 관계를 가리킨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에 수록되어 있는 고대가요 〈표유매()〉[국풍()·소남()]에서 읊어지고 있는 매화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가지에서 떨어지는 매실은 
그 개수는 일곱일세 
나를 원하는 분은 
행운을 갖다 주오 

가지에서 떨어지는 매실은 
그 개수가 셋이네 
나를 원하는 분은 
지금 서둘러 주시오 

가지에서 떨어지는 매실은 
광주리에 가득 찼네 
나를 원하는 분은 
바로 만나기를 바라오  

 

 

종래 이 노래는 혼기를 넘기려고 하는 것을 슬프게 생각한 여성이 남성을 빨리 유혹하여 구혼한 것으로 해석하였으나 중국 근대의 시인으로서 고전학자인 문일다()의 설에 따르면 이것은 고대 사람들이 매실이 익을 때 쯤 매림()에 모여서 남녀가 갈려서서 좋아하는 상대에게 여성이 매실을 던져서 애정을 표현한 척과()의 습속을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남자가 구애를 받아들인다면 그 표시로 허리의 패옥을 던져준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러한 습속에 매실이 이용되었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매실의 산미()가 임부의 입덧에 특효약이란 데서 출산의 주물로 인식되어 여기에 고대 특유의 주물적 연상이 작용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실이 애정의 주물로 일반화되지는 않았으나 시가에서 간혹 인용되고 있다.

《악부()》에는 〈승가타령()〉과 〈송여승가()〉 및 이에 대한 〈여승답사〉가 있고 계속해서 〈재송여승가〉와 〈여승재답사〉가 이어져 실려 있다. 우연히 좁은 산길에서 여승을 만나 종일 동행하게 된 젊은이가 여승을 흠모하여 서로 주고받은 사랑의 서신이다. 여승의 답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추월춘풍() 지나가고
옥창앵도() 불거는데
광음을 헬작시면
삼칠()이 작년이라
요조숙녀() 안이여든
군자호구() 어이 되며
도요방연() 느졌거든
표매시()를 원홀손가

[출처] 매화와 애정의 주물(呪物)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3. 10., 이상희)

 

 

매화터

남한산성의 서문인 우익문을 나서서 산등성이에 오르면 낙매화터라고 불리는 큰 무덤이 하나 있는데, 그 무덤에 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한양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사는 임도령이라는 총각이 있었다. 가세가 날로 기울어 끼니마저 제대로 잇지 못하게 되자 임도령은 광주에 사는 친척집에 식량을 얻으러 가게 되었다. 때는 이른 봄철이었다. 짧은 해는 임도령이 남한산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아주 캄캄하게 저물어 버렸고, 아침부터 굶고 나온 임도령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산 속의 어두움은 평지보다 더 욱 짙었고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일더니 억수같은 비와 함께 광풍이 일기 시작했다.

「큰일 났구나.」임도령은 당황했다. 날씨까지 사나운 산 속의 어두움은 칠흑만 같았고 허둥대다보니 그는 길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정신없이 산 속을 헤매고 있던 임도령은 문득 비바람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불빛 하나를 발견했다.

집이다! 임도령은 앞 뒤 헤아릴 겨를도 없이 불빛을 향해 달려갔다. 가보니 과연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주인 계십니까? 주인장 어른!」 임도령은 급히 주인을 찾았다.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 방문이 열리며 나타난 사람은 묘령의 아리따운 처녀였다. 이 깊은 산 속에 집이 있다는 것부터 생각해 보면 괴이한 일인데 더구나 묘령의 처녀 혼자 살고 있다니! 임도령은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그러나 처녀의 자태가 너무도 아름다워 차츰 황홀감에 사로잡혔고 설사 이 여인이 천년 묵은 여우나 도깨비의 화신이라고 하더라도 도망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이 밤중에 산 속에서 길을 잃으시다니, 큰일날 뻔 하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날이 새면 소녀가 길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처녀의 말이었다. 이미 제 정신을 잃은 임도령은 홀린 듯 방으로 들어갔고 쳐녀가 차려다 주는 진수성찬의 저녁밥을 먹은 뒤 그녀와 더불어 하룻밤의 뜨거운 정을 나누었다.

처녀가 자기가 산속에서 혼자 살게 된 것이나 임도령이 길을 잃고 산 속을 헤매게 된 것이나 모두가 하늘의 옥황상제의 뜻이며 두 사람의 만남도 옥황상제가 점지해준 인연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처녀는 날이 밝자 임도령에게 서둘러 길을 떠나기를 재촉하였다. 임도령은 하는 수 없이 처녀와 이별하고 그 집을 나섰다. 그러나 도저히 처녀를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얼마를 가다가 임도령은 처녀를 향해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산이 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임도령 듣거라! 나는 이 산의 산신령이다. 네가 품고 잔 여인은 이 산의 백년 묵은 암구렁이니라. 뒤돌아보지 말고 어서 길을 재촉하라」 임도령은 비로소 처녀의 정체를 알았다.

그래도 그는 어젯밤의 그 황홀했던 정경을 잊을 수가 없어 처녀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이 어찌된 일일까. 초가집은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는 해묵은 고목 한 그루가 서 있었으며, 고목 밑에 머리를 풀어헤친 어젯밤의 그 처녀가 하늘을 쳐다보며 무엇인가를 기도하고 있었다. 「왜 돌아오셨습니까? 산신령의 말대로 저는 오백년 묵은 암구렁이 입니다. 그러나 도령님과의 어젯밤 인연으로 이제 허물을 벗고 승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승천한 뒤 이곳에 비늘 세 개가 떨어질 것이니 그 자리에 임도령의 묘를 쓰십시오. 그러면 후일 자손 중에 유명한 장수가 태어날 것입니다.」 싸늘한 눈으로 임도령을 돌아보며 처녀가 말했다. 그리고 빨려 들어가듯 곧 하늘로 올라가 버렸는데, 과연 비늘 세 개가 떨어졌고, 비늘은 떨어지자마자 매화나무로 변하였다.

그 후 임도령은 장가를 들어 다복한 가정을 꾸리다가 죽었다. 그리고 죽을 때 암구렁이 처녀의 말대로 남한산의 매화나무 터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가족들이 그 유언대로 임도령의 묘를 썼는데, 과연 자손 중에 유명한 장군이 나왔으니 바로 임경업(林慶業)장군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그때의 위치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매화(落梅花)터

매화(落梅花)터

퇴계선생과 기생과 매화

도산서원에는 여러 가지 나무들이 심어져있는데 봄에 피는 매화에는 전해지고 있는 전설이 있다.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퇴계 선생을 좋아했던 기생이 있었다. 그 기생은 퇴계 선생에게 음식과 옷 등을 갖다주며 마음을 표현했지만 선생은 마음을 거절하였다. 기생은 선생의 종에게 그가 좋아하는게 뭐냐고 물었더니 종은 ‘매화’라 하였다. 기생은 종을 시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매화를 찾아오라고 시키고 그 매화를 퇴계 선생에게 주었다. 퇴계 선생은 매화를 단양군청에 심어 지금의 매화나무가 자리잡게 되었다.

                                                                          안동 도산서원 내부

 

도산서원 경내에는 여러 가지 나무들이 싱싱한 푸름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봄에 피는 매화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담겨 있다.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다. 인물 좋고 마음씨 너그럽고 글 잘하는 퇴계 선생에게 은근히 마음을 두고 온 기생이 한 사람 있었다. 선생을 사모하는 기생의 마음은 드디어 짝사랑으로 변해 선생에게 환심과 주의를 끌려고 선생 앞에서 온갖 교태를 다 부려 보아도 선생은 태산반석과 같이 조금도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기생은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한 나머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올린다, 옷을 지어 바친다, 다른 진귀한 물품을 마련해서 선생에게 바친다, 온갖 것을 선생에게 바치며 정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청렴한 선생은 민폐가 된다고 그러한 어떤 것도 받지 않았다. 그러자 사모하는 마음 간절한 기생은 마음 전할 길이 없어 짝사랑의 깊은 시름에 빠져들었다.

 

안동 도산서원 내부

 

어느 날 선생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이방에게 선생은 무엇을 좋아하시는가 하고 물으니, 선생님은 매화를 좋아한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자 기생은 끼고 있던 옥반지를 빼서 종에게 주며 세상 끝까지 찾아서라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매화나무를 구해오라 했다.

 

종은 여러 곳을 다니며 매화를 구하다가 옥보다 더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매화 한 그루를 구해서 기생에게 가져갔다. 기생은 그 매화를 들고 퇴계 선생 앞에 나가 매화를 바쳤다.

 

기생의 마음을 안 선생은 “땅에 심는 나무야 못 받을 것 없지” 하시며 그 매화나무를 단양군청 뜰에 심어서 감상하다가 도산으로 올 때 그 싹 하나를 떼어 와서 서당 앞에 심고, 계속 그 매화를 번식시켜 지금에 이르렸다고 한다.

 

퇴계가 단앙군수를 마치고 떠날 때는 조랑말 한 마리에 실린 두 궤짝의 책과 수석 몇 점과 입던 옷가지뿐이었다. 이별이 아쉬워 관원들이 삼(麻) 다발을 선사하자 한사코 사양하니 관원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떠날 때도 책 두 궤짝이었으니 오늘에 부르짖는 청렴결백한 공무원상을 450년 전에 이미 몸소 보였으니 위대한 선생의 정신은 길이 빛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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